2/9/2025 | 주현후 제 5주

온 마음 다해 믿고 가자! Let's trust with all our heart and go!

시편 138:1-8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주현절기(Epiphany)를 보내고 있습니다. "Epiphany"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이해하거나 깨닫는 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혹은 기도하는 중에,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시편 138편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믿음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의지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했습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138:1 주여, 내가 마음을 다해 주를 찬양합니다. 내가 모든 신들 앞에서 주를 찬양합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NIV 성경에서는 이를전심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All my heart"라는 표현은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성경에서 내 안에 모든 것이 외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의 찬양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간절한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화살과 창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왕의 위치에서 백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일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안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기도의 응답이 아닌 것처럼 보일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 기도의 힘을 불어 넣으시고 그가 이겨낼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2 내가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때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목마름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그의 죄와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다윗은 영적으로 갈급해졌고,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와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심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 안에  두려움과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올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길을 잃은 듯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매일 새로운 빛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고통의 순간에서도 우리를 담대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을 ,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생활과 기도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의 방법들이 안전하고 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패와 고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다하고 전심으로 주를 찾을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된 본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달려가 그 이름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전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3 내가 부르짖는 날에 주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셨고, 내 영혼에 힘껏 힘을 불어넣어 주시어 나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은 우리의 내면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표현할 없는 마음의 소리까지 다 들으십니다. 이 간절한 부르짖음은 한나의 기도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한나는 자녀를 갖지 못한 고통 속에서 깊은 갈망을 담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허락하셨습니다.

 

미국 역사에 신앙의 영향을 미친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처럼 우렁찬 음성이나 과장된 제스처 없이 원고를 읽곤 했습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성경연구에 보내고, 2시간이 넘는 설교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한 거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삶으로 체험한 그가 남긴 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겠는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봉헌된 삶이 거룩한 삶이다. 하지만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그런 삶을 살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성령과 동행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 주장할수 있으랴?..." 지금도 기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다윗의 기도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 왕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주여, 온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 모두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의 성취를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볼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도 이것을 깨닫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을 합니다. 2:47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신이요, 모든 왕들의 주인이로다. 그대가 이처럼 비밀스러운 일을 다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모든 비밀스러운 일들을 능히 드러내시는 분이시로다.

 

다니엘은 노년의 때에도 기도의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총리로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고, 다리오 왕이 그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질투한 다른 고관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왕에게 30 동안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게 만듭니다.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다니엘은 기도의 방에 들어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지만, 사건을 통해 다리오 왕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26 이제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노라. 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마땅하나니, 진실로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분의 권세는 대대로 무궁할 것이기 때문이도다" (6:25-26)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이 세상의 왕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원로 장로님에게 찾아오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있습니다. 장로님이 매주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장로님의 작은 사랑이 아이들에게 전해졌고, 이제는 아이들이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장로님을 찾아갑니다. 할아버지 장로님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뜻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참 흐뭇합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지만, 점점 늘어나 이제는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흘러가며 감사가 확장되는 모습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흘러가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5 진실로 주의 영광은 한없이 크시니, 그들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6 주께서는 지극히 높은 데 계셔도 이 땅의 낮은 자들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시고, 아주 멀고 먼 데서도 이 땅의 교만한 자들을 한눈에 다 알아보십니다. 7 내가 비록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주께서는 나를 건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강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분노하며 날뛰는 내 모든 원수들을 짓누르시고,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8 주여, 주께서는 내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니, 진실로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부디, 주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몸을 저버리지 마소서!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모든 입술이 주님을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던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우리도 자녀 삼아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의 뜻 가운데서 건지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고난의 의미를 로마서 5:3-4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은 희망의 꽃을 피우시고 우리의 삶속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힘과 생각을 의지하게 되고 연약함에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를 부를 때 성도들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아픔의 순간과 어려움의 과정을 지나는 성도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는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학업의 현장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고민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학업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일터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의 연속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현장이라고 여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터에서 찬양과 기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서로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하나님을 만나는 치열한 폭풍 속에서 함께 헤쳐 나가는 믿음의 중심이자, 함께 신앙을 훈련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서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자녀들을 말씀으로 축복해 준다면 우리의 가정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조차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을 경험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서로 돕고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시대적 사명을 기억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옆에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낮은 자리에서 부터 드러나며 그곳에서 회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2/2/2025 | 주현후 제 4주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시다 God is Still Good

시편 147:1-11

지난 30,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64명이 탑승한 여객기가 훈련 중인 헬기와 충돌하여 포토맥 강으로 추락했고, 중에는 보스턴에 거주하는 이웃교회의 집사님과 딸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은 단순히 이야기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던 딸과 그 딸의 삶을 동행하던 어머니의 소식이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소식을 접하며, 마음속에서 무력함과 슬픔이 밀려옵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런 상실과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 깊은 기도와 고민을 하게 합니다. 슬픔속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147편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때때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 마음이 상한 자들을 어루만져 고쳐주시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부드럽게 싸매주신다. 4 주께서는 별들의 수효를 일일이 헤아리시고, 하나하나의 별들마다에 이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주에 있는 셀 수 없는 별들을 기억하시고,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상처난 이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싸매 주십니다.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에는 삶의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탄식, 절규, 외침의 기도를 드린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시편이 '할렐루야'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 하나님을 찬양하는 최고의 표현으로, 절망과 탄식을 넘어 찬양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룹니다. 따라서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리는 본 시편은 전체 시편의 송영(Doxology) 역할을 합니다. 시편의 수많은 기도의 고백들이 마지막에는 '할렐루야'라는 하나님의 찬양으로 마치게 됩니다. 단어가 믿음의 성도들의 목적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의 시작과 끝은 할렐루야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성숙한 자리로 초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2절을 근거로 시편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성전과 성벽재건 이스라엘의 회복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는데요. 포로기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폐허가 성전을 보며,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유배되어 70 년간 나라와 주권을 잃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경제, 사회, 정치적 모든 현실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래된 포로생활의 세월 만큼이나 회복에 대한 희망도 희미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외쳐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는 "우리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 그 얼마나 좋은 일이며, 우리 주님께 찬양하는 일이 그 얼마나 기쁘고 마땅한 일인가!"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최고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좋은 일이며, 기쁜 일이고,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던 다윗은,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요셉은 자신을 해치려 하고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을 ,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확신하며 고백하지 않습니까? 다윗과 요셉은 그들의 환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의 주인들은 수입을 잃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합니다. 감옥에 간 이들이 그날밤 무엇을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6:25 한밤중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주께 기도하면서 찬송을 불렀고, 다른 죄수들은 그 찬송 소리를 듣고 있었다. 16:26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듯 감옥이 밑바닥부터 심하게 흔들리더니, 감옥 문이 모두 열렸다. 그리고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스르르 다 풀렸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고 원망할 만한 상황에 처했지만 감옥에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통해 상상할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양이 시작되자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모두가 찬양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떠날 있다고 생각했을 , 절망감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우리는 여기 있다" 말하며 그를 멈추게 했습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근심되는 일이 많지만 우리의 시선이 삶의 환경에 고정되면 찬양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로보면 찬양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구원의 사건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선하신 분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민족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땅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며" ( 147: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보내어 예루살렘 성벽을 52 만에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과정에서 많은 방해와 저항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 안에서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셨습니다.

 

교회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참된 성도들을 불러 모으시는 데에도 항상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부른 찬송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란과 역경 가운데서도, 최후의 승리를 믿고 드리는 곡조 붙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와 소망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려움과 저항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불러 모으시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5 진실로 우리 주님은 지극히 위대하시고, 능력이 한량없이 크시며, 그 지혜는 측량할 수조차 없도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가 한없이 크시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의 속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하나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그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열정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132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찾아갑니다. 그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연행하려던 바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열심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믿었지만,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바울이 주님께 한 일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조차 없습니다.

6 주께서는 마음이 낮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 세워주시지만, 마음이 높은 교만한 악인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고백 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일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사람 만나면 인생의 힘을 얻게 되고,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행하신 선한 일로 인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것입니다.

 

7 주께 감사의 찬양을 부르라. 즐겁게 수금을 타면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8 주께서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는 비를 내려주시며, 언덕마다 푸른 풀이 자라나게 하신다. 9 배고픈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울어대는 어린 까마귀에게도 먹을 것을 주신다. 10 주께서는 힘센 말이라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굳센 다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좋아하지 않으신다. 11 오직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는 이들을 기뻐하신다.

 

웨슬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지아주로 떠나 굳센 의지로 선교했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습니다. 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중요한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배에는 독일 모라비아 교도 2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 다가온 폭풍은 상상할 없을 정도로 거세었고, 웨슬리는 17361 23 일기에서 "금요일 저녁, 번째 폭풍이 들이닥쳤을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믿음 없음을 어찌할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합니다. 1 25, 그때의 상황을 웨슬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마치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같았다. ... 배가 뒤로 심하게 흔들려...무엇을 붙들지 않으면 잠시라도 있을 수가 없었다....맹렬한 파도는 10 마다 배를 사방을 때려 산산조각 것만 같았다." 공포의 상황이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침착하게 찬송을 부르던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다가가 "죽음의 공포를 몰고 폭풍이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의 대답은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웨슬리는 그들의 평온한 찬송을 보며 "이날은 내가 지금까지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기록했습니다. 웨슬리에게 경험은 깊은 신앙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속에는 많은 거절감과 실패와 아픔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마주하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고백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의 작은 고백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위로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속에서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방을 하고 가정을 위해 기도할 찬양과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지쳐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넘어 삶의 모든 자리에 함께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자녀들과는 함께 찬양의 기쁨을 나누고 학업과 일터의 현장에서는 일에 대한 부담과 반복되는 업무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감사의 찬양을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47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밀히 돌보아 주심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과 염려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찬양의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음이 낮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황에 지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를 통하여 찬양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까지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시며 우리의 모든 순간을 돌보아 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광야를 지나며' 라는 찬양이 아픔과 고통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꿈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기도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곳이지만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를 경험하면 주변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26/2025 | (당회 주일)

새해 말씀 시리즈 4 새해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Live in the New Year?

시편 111:1-10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새로운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되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영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 4:14)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리의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 갈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336절 한구절을 더 보시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영생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는자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의 구절들에서 영생이 예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순종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시편의 찬송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의로우심을 찬양하며, '영원'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3절에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5절에는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8절에서는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다. 9절에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으니, 진실로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위대하도다. 10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영생을 믿고, 영원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끝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 예측할 없는 미래를 믿음으로 걸어가는 , 주어진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인생의 풍랑을 만나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헤쳐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힘과 권세로 내몰고 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일으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와 신실한 언약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시편에서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라고 찬양하는 선언은, 의로움이 영원히 변함없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은 우리 수준 이상의 위대한 일을 이룰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고백만 하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주님을 닮아가려는 길에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선택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결정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셔서 영원한 통치와 영원한 언약이 되셨습니다. 이 소망이 현실을 사는 성도들을 인내하게 합니다. 영생을 추구하는 삶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과 대조가 되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영적인 체육관에서 믿음의 삶을 훈련받게 합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8:18)라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고난도 믿음의 훈련의 길이었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의 아픔을 공동체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찾아온 공동체에서도 많은 상처와 거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삶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서로의 약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영성이 공동체의 제자도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괴롭게 덧없이 끝날 때가 많다. 세월이 갈수록 오래오래 공고해지는 관계가 아니라 불화와 결별로 치닫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인 친밀함을 채워줄 사람을 찾다가 우리는 점차 절망에 빠진다. 내 외로움을 없애줄 사람을 찾다 보면반짝반짝하던’ 기대가 하루아침에먹구름으로 잔뜩 흐려진’ 탈진과 우울로 변할 수 있다. 어디를 보나 외로운 사람들 천지다. 현대 서구사회에서 고난의 주된 원인은 아마 외로움일 것이다. ......공동체란 외로움이 외로움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공동체란 고독이 고독을 반기는 것이다. “나도 사랑 받는 자이고, 너도 사랑 받는 자다. 우리는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 서로 가까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참 좋다. 사랑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힘들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충실할 수 있다. 함께 집을 지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위한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공동체의 훈련 속에 용서의 훈련과 기쁨의 훈련이 있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 기타 모든 형태의 공동체는 용서와 기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직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4:3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단순히 우리의 고독과 외로움을 해결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되시는 주님으로 부터 한줄기 빛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10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원했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 명확한 해답을 찾지는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인생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1절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음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라."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모여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정직함은 모든 행실의 청렴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 드리고,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만일 지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금 구해야 할 때입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참으로 크고 놀라우시니,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모두가 두고두고 일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구나!"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맡겨진 소명을 깊이 생각하며,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품고 추구하게 하십니다.

3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진실로 영광스럽고 장엄하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이 의로우심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 썩어져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고, 그것이 열매를 맺는 과정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가치가 변화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가정, 사회에서 겪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정직하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 우리는 의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현실 속에서 우리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45절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로 다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가득 차고 넘치는구나. 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며,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사건을 말하고 있고, 매일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인듯 합니다. 6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다수의 보고와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자기백성들에게 그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이 일은 인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6 주께서는 뭇 민족들의 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심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크신 권능을 보여주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배고픔과 목마름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매일 양식을 공급하시며 자기백성에게 인내와 순종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광야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가 인내하고 견디는 힘이 됩니다. 믿음은 영생의 개념처럼 추상적이지만, 믿음 생활은 실제적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통해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마다 오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할때 광야에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양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필요와 일상적인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와 자비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Eugene H. Peterson,1932-2018)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책에서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며, 모든 상황과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것은 살균처리가 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상황속에서 다루어져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7 주께서 손수 하시는 일마다 한결같이 참되고 의로우시니, 주의 법도는 진실로 믿음직스럽도다. 8 그러므로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으리니, 이는 그 법도가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라." 오늘날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 나를 위한 삶을 위해 법을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법은 시대가 변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만일 법이 수시로 바뀐다면 삶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정하신 법은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말씀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보호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따르는 자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영원토록 나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깨달음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며, 결국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찾아오시고, 안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삶의 자리나 형편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걷는 믿음의 여정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보여줄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픔과 상처. 외면 당하고 고통 가운데서도 교회의 공동체에서 사랑 받고 위로 받아 하나님을 다시 붙들수 있도록 서로가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의 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단지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려는 헌신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우리의 공동체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사랑과 정의로 살아갈 , 세상은 사랑과 정의를 통해 변화하게 됩니다. 이번 주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를 축원합니다.


1/19/2025 |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3 시편 36편의 희망 Hope in Psalm 36

시편 36:5-10

이번 미서부 지역의 산불 피해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산불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도 있고, 평소에 장을 보던 마트도,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평생을 살아온 자택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고 재만 남았습니다. 뉴스를 듣는데 66세 한 사람이 56년 동안 살던 집을 지키려고 하다가 생명을 잃게 된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56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때로는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안식처였고, 고된 일을 마친 후 돌아오면 쉼을 주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그 집에서 성장하며 꿈을 키웠을 것이고, 가족들과 함께하며 안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 집은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켜켜이 쌓인 소중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불로 그 집이 불타는 순간, 그가 느꼈을 감정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이었겠지요.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상실감에 휩싸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피해 입은 이들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모아진 헌금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잘 쓰여질 수 있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권면합니다.

 

오늘 시편 36편은 다윗의 찬양시입니다. 다윗은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다윗은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라고 찬송합니다.

 

여기서 주의 집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켰고,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는 언약궤를 안치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신앙에서 언약궤는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뜻을 깨닫게 되는 계시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를 전쟁을 이기기 위한  마법상자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할 것들인 돈이나 사람들, 우상들을 섬기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우리의 수단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정확히 드러내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만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죄가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세가지 성물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드러냅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주신 율법을 나타내지만 또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를 지적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면서도, 당시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신 표적이기도 합니다.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가 없음을 불평할 때 그들에게 베푸신 하늘의 양식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처럼 언약궤 안에 담긴 성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기도 합니다. 교회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구속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4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또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구약시대의 속죄소가 신약에서는은혜의 보좌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보좌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으며,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됩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학자들은 7절의 주의 날개를 언약궤의 속죄소를 덮은 그룹의 날개에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언약궤의 뚜껑에는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이라고 불리는 두 천사가 마주보고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호하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는 보호받고 안전하게 숨을 수 있으며 그 은혜는 성도들의 삶을 온전히 감싸고 있습니다.

 

다윗의 바라본 주님의 은혜는 시편 36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절에서 4절에서는 악한 자들의 마음이 드러나고,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8절에 이르러,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감싸고 보호하는지 고백합니다. 이 두 대조적인 부분을 교차하여 살펴보면,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악한 자의 마음속에는 온통 죄의 속삭임뿐이어서, 그의 눈에는 하나님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구나. 5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2 저들은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 죄를 찾아내어 버릴 생각일랑 전혀 하지 못하는구나.
3
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모조리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지혜롭고 선하게 행동하기는 애당초 틀려버렸구나.

6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4 저들은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악한 궁리를 꾸며내고, 스스로 죄의 길에 들어서며, 악한 짓 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구나.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이 찬송가의 유래를 살펴보니까, 프레드릭 밀러(Miller, Frederick S.:1886-1937) 선교사가 찬송가를 작사하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이름은 민노아 선교사입니다. 그가 지은 5곡의 찬송시가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1892년 조선에 도착합니다. 1898 11월 첫 아들을 낳았으나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1902 3월 태어난 둘째 아들도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년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이기에 가족마저 잃으며 힘들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민노아 선교사는 응답 대신 찬송가를 지었는데, 그 찬양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96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충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인생의 아픔속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양화진에 안장된 그의 아내 안나 밀러의 묘지에는 ‘In Jesus’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평안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복음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두려움과 절망이 힘을 잃고, 오히려 그 흔적을 지닌채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77세의 일기로 고인이 된 영성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 1935 - 2013)"잊혀진 제자도: The Great Omission"라는 그의 책에서 천국 열쇠가 있다는 것은 천국 접근을 통제하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이며 즐거이 드나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천국 열쇠를 두고 교회는 오랜 논쟁을 벌여 왔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믿는다면 천국의 부를 실제로 가져다 쓸수 있기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 위에서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신 선한 일을 주목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인생을 살면서 예상치 못한 길에서도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인자와 성실,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거짓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이들을 살리고,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시는 것은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9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주의 환한 빛 가운데서 광명을 봅니다. 10 오 주여, 주께서는 주를 섬기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마음이 올바른 이들에게 주의 변함없는 의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빌립보 교우들의 사랑과 헌금으로 한 개인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는 사랑과 복을 다시 빌립보 교우들에게 흘려 보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 19)

 

하나님의 구원의 빛 가운데서만 성도는 참된 삶 ,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 냅니다. 주께 속죄함을 받는 빛의 자녀들은 어둠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직접 이 땅에 와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하나님은 참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는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바라 보며 우리를 희망찬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인생은 아픔과 기쁨이 고스란히 쌓여가는 과정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자라온 환경과 시간을 보여줍니다. 비가 많이 오고 햇빛이 잘 드는 때에는 나무가 빠르게 성장하여 나이테 간격이 넓어지고, 가뭄이나 햇빛 부족으로 성장이 느려지면 나이테 간격이 좁아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어려운 시간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도, 그 시간들이 쌓여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고,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됩니다. 빛의 자녀는 절망하는 이들에게 새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의 삶을 나누며 그 은혜가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때에 성도의 삶속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1/12/2025 |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2 "있는 모습 그대로" "Just As You Are"

시편 8:3-6

이 사진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 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 벽화는 그가 33세에 그리기 시작해서 4년의 시간 동안 목과 머리를 뒤로 젖힌채 작업을 마친 작품입니다. 벽화의 그림을 요청을 받고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온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는데 벽화 그리기에 몰두했던 그가 마침내 불후의 명작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던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작품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시지 않았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 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속에서 그의 믿음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시편의 기자는 하늘, , 자연만물, 하늘의 달과 별들, 무한한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비교할 때, 인간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보살펴 주시며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8:3 주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친히 만드신 저 하늘과 또 창공에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우러러 바라봅니다. 4 참으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듯 생각해 주시며, 과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는지요!

 

수천 년 전 다윗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해를 보고, 공기와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 손가락'으로 창조하신 하늘과 달,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크리스천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히브리서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과 함께 히브리서의 구절도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8:5 주께서는 사람을 신적인 존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9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 마침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이기고, 지금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채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우러러 봅니다. 정녕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약 성경에 매우 해박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가 기록한 하나님이 행하신 비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다'는 구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지만 그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상태로 아버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가 얻은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냅니다.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찬양의 시인데, 히브리서의 구절은 시편 8편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광과 존귀'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실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분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잠깐 동안 낮아지신 이유를 첫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주기 위함이며, 둘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215절 보시겠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2:15)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 안에 자신의 형상을 새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억눌린 인간을 찾아오셨고, 그분의 오심으로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82 12 4일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받는 간호사들은 울었고, 태어난 아이를 안아 주라는 의사의 권면에 엄마의 반응은 이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고 데리고 나가 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이 아이를 받아 들이기 까지는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에게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의 부모는 절망과 충격속에서 틈만 나면 눈물을 쏟았습니다. 또한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원망과 고통속에서 몸부림칩니다. 8살이 되었을때에 이 소년은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자 마음 안에 절망과 파괴적인 충동들로 인해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합니다. 그는 어릴때 부터 팔과 다리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15살 때에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셨고, 그의 입술을 통하여 절망과 불행속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주님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호주의 복음 전도자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현재)입니다.

 

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 자신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체적 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약함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닉을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팔과 다리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의 몸을 고쳐주지 않으셨지만, 닉은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도 사용하십니다. 당신이 느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부족함과 상처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죽음이 죽어버린 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한줌의 흙만 남게 되기에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해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삶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잊으시지 않지만 우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누가 크냐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말씀합니다. 2 11절 보시겠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구절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한 피로 형제 삼아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각자가 믿음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약함을 가진 바울은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약함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삶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고백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기꺼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개역개정)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히 죽음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십니까? 그럴 때일수록 영광의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셨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다.  6 또 주께서는 손수 지으신 것들을 사람이 일일이 다스리게 하시고, 온갖 피조물들을 사람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세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채우지 못하여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영적 공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과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하늘, 캄캄하고 광대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손수 만드신 하늘 보석, 제자리에 박아 넣으신 달과 별들을, 그리고 한없이 작은 내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신들보다 조금 못한 자들, 주님은 에덴의 새벽빛으로 빛나는 우리에게 손수 지으신 세상을 맡기시고 창조의 임무를 되새기게 하셨습니다."(메세지 성경)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그저 감사와 은혜 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인간을 회복시키고,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모두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또 다른 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4 18절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새해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문제와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맡겨진 책임을 적극적으로 다하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믿음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강렬한 빛과 같습니다.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의 말 한마디가 어둠을 밝히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며,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